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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즈스탄역사적으로 가장 매혹적인 곳, 키르기즈스탄의 모든것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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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키르기즈스탄 국가정보

국명 키르기즈스탄 Kyrgyzstan
위치 중앙 아시아 북부
면적 19만 8500㎢
인구 489만 5000명(2000)
인구밀도 24.5명 / ㎢(2000)
수도 비슈케크
정체 공화제
공용어 키르기즈어
통화 솜(som)
환율 48.12솜 = 1달러(2000. 10)
1인당
국민 총생산
380달러(1998)

정식명칭은 키르기즈스탄 공화국(Repubilc of Kyrgyzstan)이다. 북쪽으로 카자흐스탄, 동, 남쪽으로 타지키스탄, 서쪽으로 우즈베키스탄에 접한다.
소비에트 투르키스탄의 일부였다가 독립국가로 주권을 선언했고, 독립국가연합국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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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자연

키르기즈스탄은 동서 900km, 남북410km의 짧은거리에도 지형의 변화가 많은 산악국이다. 산지가 92%, 경작 거주지인 평야지가 8%정도이며,
국토의 평균해발고도가 2,750m이다. 수도인 비슈케크도 해발고도 774m의 고지에 위치한다. 전 국토가 10여 개의 산맥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들 산맥은 톈산산맥·파미르고원·키르기즈산맥 등으로 모두 동서로 뻗어있으며, 여러개의 고립된 협곡지대로 구분된다. 톈산산맥은 포베다산(7,439m)과 같은 고봉으로 되어있어 만년설이나 얼음으로 덮혀있고, 중국과 국경을 이룬다.

키르기즈스탄은 산악국가이므로 키르기즈스탄의 기후는 해발고도와 사면의 방향에 따라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서부와 북서부의 산록에서는 강수량이 800mm,
곡저분지에서는 200~300mm 정도이다. 해발고도 3,000m까지는 높아짐에 따라 강수량이 증가하나, 3,000m이상에서는 여름에도 비가 눈으로 되어 내린다.
이러한 강수량은 톈산산맥에서 풍부한 복류수(伏流水)가 되어 오아시스를 만들어, 관개나 생활·산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해발고도 774m에 위치한 비슈케크의 연강수량은 363m이나, 해발고도 1,768m인 프르제발스크에서는 460mm이다. 1월 평균기온은 모두 -4℃이나 7월 평균기온은 비슈케크에서는 25℃, 프르제발스크에서는 18℃가된다. 하곡에서의 평균기온은 1월이 -7℃이고, 7월은 15~29℃이다.

식생은 해발고도와 강수량에 따라 다르나 꽃이 많이 피는 고산성 식물과 삼림으로 침엽수가 곡저와 북사면에서 많이 보인다. 경지는 해발고도 1,200m, 소나무류는 2,400m, 고산성 목초지는 3,300m까지 분포한다. 계곡의 일부에는 사과·배·건포도·살구·호도 등이 야생한다.
동물은 저사면에 사는 텃새와 면양·영양 등이 있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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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주민

키르기즈스탄의 주민 중 52.4%는 키르기즈인(人)이며, 다음으로 러시아인이 18%, 우즈벡인이 12.9%, 우크라이나인이 2.5%, 독일인이 2.4%
그 외에 소수민족이 11.8%에 이른다. 이 중에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된 한국인 1만 9,355명이 있다.

주민은 1998년 현재 높은 출생률(22.03/1,000명)을 나타내나, 사망률은 8.65/1,000명으로 선진국 수준으로 낮아졌다. 이 중 출생률이 높은 민족은 키르기즈인과
기타 중앙아시아인이며, 러시아인이나 유럽계 민족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출생률이 급격히 낮아졌다.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한 비(非)키르기즈계 인구가 1990~91년에 16만 명이나 러시아 연방으로 이주하였다.
키르기즈인은 카라-키르기즈(Kara-Kirgiz)라고도 부르는데, 중앙아시아 민족으로서 근래까지 주로 유목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키르기즈스탄 외에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양국과 중국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 거주하고 있다.

키르기즈인은 고대부터 예니세이강(江)의 상류에 거주했는데, 키르기즈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난 것은 8세기의 오르호른 비문(碑文)이다. 당시 중국의 사서에
수염이 붉고, 안색이 희며 눈동자가 녹색이라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키르기즈인은 원래 터키계가 아니고 유럽아리안계인 듯 하다. 그러나 그들은 오랫동안
터키계의 흉노, 돌궐등의 여러 민족의 지배하에 있어 일찍 부터 터키화되어 있었는데, 이는 7~8세기 그들의 언어와 문자가 터키계였던 것에서 알 수 있다.
키르기즈인은 인접한 카자흐인과 혼동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전혀 다른 계통으로써, 키르기즈인은 몽골적인 특징이 뚜렷한 카자흐인과 체질적으로도 명백히
구분된다.

언어는 터키어의 방언인 키르기즈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으나, 민족간의 공통어로서 러시아어를 인정하고 있다.
러시아인 등 유럽계통의 주민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다민족 국가이므로 다언어 사용집단이 있어, 2중·3중의 언어사용자도 많다.
즉 러시아어와 각 민족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소련시대에 러시아어를 공용어로정하여 교육을 통한 보급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종교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등을 제외하면 이슬람교(75%)를 믿으며, 독립 후 이슬람 부흥 운동이 있으나 원리주의로의 복귀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키르기즈스탄 주민의 도시거주율은 39%, 농촌거주율은 61%로서 농촌인구의 비율이 높다. 수도 비슈케크의 인구는 1994년 현재 60만 명이고 독립 전까지도
시민의 과반수는 러시아인이었다. 또한, 남부에 있는 오슈시(市)의 인구는 24만 명(1994)이었다.
인구는 수도 비슈케크가 소재하는 추강 유역과 페르가나 분지의 동남단에 있는 오슈주(州)에서 77%를 점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인은 추강 지역에
집중하여 거주하고 있다. 주민의 생활수준은 높은 편이 아니며, 실업률은 1998년 현재 3.1%로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에 비해 낮다. 종교·문화적 영향으로
여성의 비노동으로 남자 가장 1명의 수입으로 가계가 유지되며, 자녀의 수가 많아 국민생활의 수준은 다른 중앙아시아 제국에 비해 보통 수준이고
카자흐스탄보다는 낮은 수준이다.

교육은 10년제의 보통중등과정의 의무교육이 거의 완료되었다. 고등교육 기관으로는 농업·의학·교육 등의 단과대학이 10여개 있으며,
특히 키르기즈대학(10개 단과대학)이 유명하다. 이들 교육기관은 독립 후 민족어를 도입하고 있으나, 교과서·참고서가 오랫동안 러시아어로 되어 있어서
민족어를 해독 못하고, 러시아어만을 아는 교사가 많기 때문에 10여 년 이상 시간이 걸리면서 이행될 예정이다. 이러한 키즈기즈어의 공용어 지정에 있어
러시아인에 대한 배려로는 정부는 슬라브대학을 신설하여,러시아·우크라이나인 학자에게 학생·연구자의 지도를 담당하게 하는 등 키르기즈인과
러시아인, 기타 민족과의 이해균형을 도모하고 있다.

키르기즈인은 유목민의 전통을 의식하는 민족어로써, 부족주의 성격이 강하며 남부와 북부의 문화적 차이가 크다.
옛 실크로드를 따라서 발달한 취락이었으나, 코칸드 한국이 1825년에 토성의 요새를 건설하고 피슈페크(Pish Pek)라고 불렀다.
1940년 후 러시아가 이 요새지를 파괴하고 자국의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토성 요새지의 흔적은 제2차 세계대전후 까지 일부남아있었으나
현재는 신흥 아파트 지역으로 바뀌었다. 도시경관은 중앙아시아적 경관은 없고 러시아의 도시풍이며, 오래된 고목, 뒷골목의 주택은 우크라이나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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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역사

키르기즈스탄은 러시아 혁명 후 성립되었으나, 그 주요 민족인 키르기즈인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키르기즈인은 기원전부터 예니세이강 상류 유역의 삼림지역에 살던 수렵민족집단으로 중국이나 페르시아의 역사서에 나타난다. 중국은 한대(漢代)에는 견곤(堅昆)으로 기록되었고, 기원전에는 흉노에 복속되었다. 7세기에는 돌궐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돌궐이 붕괴할 때는 당(唐)나라의 속령이 되었다. 그 후 위구르가 성립하면서 그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840에는 10만의 기병으로 위구르의 수도를 공략하여 위구르를 멸망시킴으로써 위구르인을 서쪽으로 이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같이 북아시아 유목민의 세력에 압력을 받으면서도 독립을 유지하였다. 11세기경에는 도시를 건설했고, 13세기에는 관직제도를 정비한 부족국가를 건설하였다.

13세기에는 몽골족의 칭기즈칸에 정복되어 지배를 받았으나, 몽골이멸망한 후에는 오이라트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에 이르러 그 일부가 남서의 세미레체 지방으로 이동하였고, 18세기에는 다시 톈산산맥의 북측과 페르가나 협곡의 현재의 거주지로 이동하였다.
1758~59년에 중국의 청나라 동(東)투르키스탄을 정복할 때, 키르기즈인의 일부는 청나라에 복속되었고,톈산산맥 중의 이시크쿨호(湖)에서
타림 분지의 북변, 페르가나의 동부, 파미르 산지에 분포하여 유목생활을 했으나 국가형태를 취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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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정치

키르기즈스탄은 1991년 독립 후,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정하여 언론의 자유와, 정당결성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또한 시장경제의 법적 기반을 정비하여 가격과 기업활동을 거의 전면적으로 자유화하였다. 국가기업 사기업화의 순조로운 진행과 농지의 재분배 등에서
어느 CIS 국가보다 착실하게 개혁이 진척되어 가고 있다. 또한 민족간 여러 세력의 화합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국경선 설정이 민족 고유의 역사적·문화적
동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러시아의 통치 편의에 따라서 구획되었으므로 계속적으로 유지될지는 의문이다.
1989년에 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의 국경에서 토지와 물 이용권에 관련해 양국민이 충돌하여 사망자까지 생겨났고,
현재도 타지키스탄에서는 국경의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1990년에는 페르가나 분지의 키르기즈스탄 영토인 오슈주(州)에서 주택용지의 분배를 둘러싸고 키르기즈인과 우즈벡인이 대립하여 폭동이 일어난 일이 있다.
이는 오슈주 인구의 1/3, 오슈시(市)시민의 절반 이상인 우즈벡인이 자치와 우즈베키스탄 으로의 편입을 주장해 양국 국민 감정의 대립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소요는 약 1주간 계속되어 사망자 230여 명을 포함, 4,0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와 같은 민족분쟁은 카프카스 지역만큼 격심하지는 않았으나,
그 동안 잠재되었던 문제점들의 노출이자, 민족분쟁의 요인인 사회적·경제적 위기가 미묘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즉 민족의식을 아직 갖지 못한 이들의 생산형태, 문화적·인종적 특징을 달리하는 정주민과 유목민의 정통성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현재는 문제로 표출되지 않고 있으나, 지위·권력의 분배에서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외에 러시아인과의 문제도 있으나 러시아인의 수가 많고,
그들의 상당수가기술자·노동자인데다가 현지 경제에 필요하기도 하여 러시아인에 대한 감정이 카프카스 지역보다는 심각하지 않다.
경제·군사면에서 러시아와 연계되어 있었으므로 독자성이 결여되어 있어 급격한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경제·정치·군사 면에서는 현실에 입각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외교면에서는 현실외교를 일관해서 추진,러시아를 중심으로 CIS국가들과
경제·정치·군사 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1995년 현재의 지도부는 CIS 강화의 열렬한 추진자로 인정받고 있다.
아케이브로 1995년 임기 5년의 대통령직에 재선되었다. 수상은 1998년에 쥬마리에프가 선출되었다.
의회는 양원제이며 국민대표의회와 하원으로 구성된다. 국민대표의회는 70명, 하원은 35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임기는 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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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경제

키르기즈스탄은 농업이 발달되었는데, 1997년 현재 GDP의 43%를 농업이 차지하고 있다.
주요 생산 품목은 육류, 모, 가죽, 면, 견, 담배 등이다. 토지의 90%를 개인이 소유하고 있고, 상속 및 사용권 양도가 가능하다.
전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지 방목이나 이목 형태로 여름에는 산지로 이동사육하고 겨울에는 저지에서 사육된다. 곡물농업은 일반적으로
보리·밀·옥수수·쌀 등이 재배되는데, 종래는 많은 지역에서 물 부족으로 어려웠으나 근래에 풍부한 고산의 만년설이나 빙하의 수원을
관개함으로써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추강 운하·오르도토고이 저수지·아트바시강(江)의 관개망에 의해서 경작되고 있어, 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과는 달리 식량을 자급하는 나라이다.
그 외에 북부의 사탕무·케나프(장섬유질 식물), 이시크쿨 호반의 의약용 양귀비 재배와, 남부 페르가나 분지의 황색잎 담배·목화·남방종의 대마,
양잠과 벼농사가 이루어지며, 동시에 과수농업으로 포도·앵두 등이 재배된다.
지하자원으로는 수은·텅스텐·안티몬 등이 생산돼 구소련의 군수산업에 공헌하였으며, 석탄·석유가 채굴된다.
전력은 나린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해서 톡토굴 등의 발전소에서 총 발전량의 1/4를 공급한다.

공업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공장이 인전해 왔고, 대전 후 본격적인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기계농업은 공작기계·농업기계·전기기구를 생산하며,
기타 제면·제사·직물 등의 경공업·식품공업도 발전되어 있다. 이들 공업은 북부의 비슈케크와 추강의 계곡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남부의 페르가나 분지 연변의 지역으로 대별되며, 공업의 내용가 성격면에서 다르다.
한편 매우 불편한 교통로의 정비와 관련해 공업지대가 늘어나고 있다. 즉 추강 계곡은 우즈베키스탄으로부터 철도가 인입되면서 초기에는
제당·정육·제분·피혁제품 및 과실과 육류의 통조림공장 등 농산물가공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후에 기계·금속가공업과 농기계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으로부터의 철도가 개통되면서 남부에서는 페르가나와 오슈를 중심으로 한 석탄 등 지하자원 개발을 꾀하였으나 후에 비철금속의
선광과 견직·면방직물의 공장, 면실유공장, 농기계 공장 등의 섬유 및 식품공업 부문이 발전하게 되었다.
키르기즈스탄은 다른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에 비해 빠르게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여 지속적인 수출촉진 및 수입억제 정책으로 1998년 현재 무역규모는
수출이 6억 3,000만 달러, 수입은 6억 7,000만 달러이다. 수출 상대국은 중국, 영국 등이며 수입 상대국은 터키, 쿠바, 미국 독일이다.
주요 수출품목은 석탄, 전력, 식품, 면, 모 제품 등이다.

키르기즈스탄은 고산지대로서 복잡한 지형을 가진 자연조건 때문에 철도 건설이 곤란하여 약 378km에 불과하고, 이것도 각기 북부의 일부와 남부의
일부지방에서 출발하여 외부에서 연결된다. 따라서 자동차도로가 발달하여 국내 화물수송의 80%를 도로에 의존한다.
1996년 현재 도로 총연장은 1만 8,600km이고, 포장률은 91%이다. 도로교통에 의한 수송비는 비슈케크를 1로 한경우 북부의 원격지는 4.6배이고,
남부에서는 7.2배로 평지와 산간지역 간에 큰 차이가 있다. 이시크쿨호는 겨울에도 얼지 않으므로 목재·석유제품·밀 등의 수송에 이용된다.
비슈케크에 공항이 있어 모스크바·타슈켄트와의 정기항공편이 운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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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대한관계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한국과는 1992년 1월 31일 수교를 맺었고, 북한과는 같은 해 1월 21일 국교를 수립하였다.
1997년 현재 무역규모는 대한수출 17만 달러, 대한수입 792만 달러이며, 교민수는 1만 6,615명이고 체류자는 3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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